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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책

낙하하다 _ 서글픈 공감

 

낙하하다
파씨의 입문 _ 낙하하다

 

 

나의 소망은 잘 죽는 것


황정은의 소설 「낙하하다」에 나오는 화자는 이유도 모른 채 삼 년째 떨어지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떨어지기 직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지루한 꿈을 꾸는 중이던지 아니면 순식간에 죽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본인은 늘 호상을 소망해 왔고 잘 죽고 싶었다고 얘기한다. 

 

 

낙하하다

나로 말하자면 줄기차게 호상을 소망했다. 잘 죽고 싶었다.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잘 죽고 싶다고 대답한 적도 있다. 장래희망이 죽는 것이냐고 되묻는 사람에게 죽고 싶은 것이 아니고 잘 죽고 싶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낙하하다」 중 64페이지 발췌

 

 

 

낙하하다

여름엔 복숭아를 듬뿍 먹고 가을엔 사과를 양껏 먹을 수 있는 정도로 만족하며 살다가 양지바른 곳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느닷없이 불에 타거나 물에 쓸려가거나 무너지는 건축물에 깔리는 일 없이, 조금 더 바란다면 길고 고통스러운 병에 시달리지 않고 죽음을 맞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낙하하다」 중 64페이지 발췌

 

 

이 소설에 나오는 화자의 생각에 대부분 공감하나 죽음에 대해서 얘기하는 이 부분은 특히 내 일기장을 보는 것처럼 찌릿하게 와닿았다. 사는 게 끔찍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부터 끔찍한 죽음에 대해 늘 염려해 왔기 때문이다. 사실 난 잘 죽는 것까진 바라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평균 이상의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낙하하다」의 화자 보다 나의 죽음에 대한 소망은 훨씬 부정적인 감정에서 오는 것이긴 하지만 잘 죽으려면 최대한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동일하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어떻게 죽던 어쨌든 죽는 거는 마찬가지니 죽는 과정보다는 내가 죽어서 누군가 조금 더 불행해지지 않을까에 대한 염려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죽음이 누군가에게 최소한의 불행을 주려면 최대한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더 강해졌다.

 

 

 

떨어지고 떨어진다

 

 


세 개의 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있지 않고 면을 이루는 평면은 하나 존재하고 유일하다. 

 

이런 문장을 외우며 화자는 외롭게 계속 떨어지고 있다. 야노 씨가 말해준 빗방울처럼 아무 곳에도 닿지 못하고 그저 떨어진다. 야노 씨는 어느 날 가치관이 맞지 않다며 떠났다고 하는데 이 이름을 말할 때마다 외롭고 쓸쓸한 감정이 더욱 더 느껴진다. 

그리고 이어서 구멍이 없는 개수대가 있는 옳지 않은 방에 사는 늙은 남자의 이야기도 떠올리는데 밑도 끝도 없이 오후를 기다리는 그 이야기에서 지옥을 떠올린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지옥에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지옥이란 생전에 자신이 가장 무섭다고 생각했던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일지도 모른다. 각자가 무서워서 사로잡힌 어떤 것들로 넘쳐나는 세계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 어떤 사람에게는 미친 엄마 어떤 사람에게는 굶주림 어떤 사람에게는 침묵 어떤 사람에게는 돼지들 어떤 사람에게는 방법도 없이 견뎌야 하는 추위 어떤 사람에게는 사이렌 어떤 사람에게는 달걀 속의 뼈 어떤 사람에게는 편협한 전도사의 눈길에 구현된 신의 눈. 이런 것들이라면 반드시 죽은 뒤 도래하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낙하하다」 중 71페이지 발췌

 

 

 

화자는 세 개의 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있지 않고 면을 이루는 평면은 하나 존재하고 유일하다는 문장을 거듭 말하는 자신의 표정은 완고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아주머니를 떠올린다. 그 아주머니는 길을 물었고 본인은 그날따라 웃으며 설명을 해줬는데 아주머니가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친절하게 대답해줘서 고맙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는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누군가가 없어서 쓸쓸했을지 모를 그 아주머니를 자기 자신이었을지 모르겠다고도 생각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읽고 있던 나는 그 아주머니를 쓸쓸하게 만든 친절하지 않은 대답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대답들은 길을 가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묻는 그 아주머니가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라고도 생각했다.

 

 

빗방울

외롭고 두려운 것도 관성이 되었다.
관성적으로 외롭고 두렵다.
외롭고 두렵고 무엇보다도 지루하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진다.

「낙하하다」 중 77페이지 발췌

 

 

때론 지옥 같다가도 죽었나 싶다가도 꿈인가 싶도록 밑도 끝도 없이 계속 떨어지던 화자는 이젠 어디든 충돌하고 싶다고 한다. 누군가 충돌해주면 고맙다고 말할까 생각하며 떨어지고 떨어지고 상승하고 떨어진다.

 

 

 

파씨의입문
파씨의 입문_황정은 소설집_낙하하다_창비

 

「낙하하다」는 황정은 소설집 파씨의 입문의 세 번째 순서로 실린 단편소설이다. 이 책 안에 있는 소설들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인상적이지만 「낙하하다」는 나를 읽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었으나 미처 하지 못한 그런 것들이었다. 나를 대신 정리해주는 느낌이라 읽을 때마다 늘 마음이 편해진다. 명상집이나 그런 류의 느낌과는 다르고 공감에서 오는 안도감이다. 외롭고 쓸쓸할 때 이 소설을 읽으면 안심이 되지만 현실세계에서 내가 이런 말들을 한다면 더 외롭고 쓸쓸해질 것이다. 

 

현실에서는 가치관이 맞지 않네요 하며 어느 날 떠나버리는 야노 씨와 길을 묻는 낯선 사람을 친절하지 않게 대하는 그들이 더 옳을 것이다. 그리고 길도 잘 몰라서 낯선 사람에게 물으면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아주머니가 옳지 않을 것이다. 구멍이 없는 개수대가 있는 옳지 않은 방을 만들어서 세를 받고 있는 그들은 옳고 그 방에서 세를 내며 살고 있는 늙은 남자는 옳지 않을 것이다. 

 

내가 현실세계를 너무 부정적으로 내모나 싶지만 살면 살수록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게 늘어가니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나에게는 이성이란 것도 있으니 최대한 현실에서 옳은 삶을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는 목표를 가지고 잘 살아봐야겠다. 그리고 이 소설에 나오는 문장들은 동일 단어를 반복하는 스타일이 많았는데 이 부분도 현실에서는 옳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으나 이 안에서는 너무 좋았다. 완전 취향 저격 소설이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그렇게 생각하기로 생각해두었다.
쓸쓸하고 떨어지고 떨어지고 쓸쓸하고 떨어지고 도무지 견디기 어렵다.
누가 누가 누가 없어요 나와 나와 나와 충돌해줘.
낙하 낙하 낙하 낙하보다는 빠른 속도로 떠오른다.

「낙하하다」 중 읽고 읽다가 발췌하고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