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책

자기 앞의 생 _ 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에밀 아자르 _ 로맹 가리

이미 많이 알려진 대로 「자기 앞의 생」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두 번째 콩쿠르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로맹 가리라는 이름의 틀 안에서 평가받는 것이 지겨워져서 새로운 존재가 되어서 책을 써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은 작가가 스무 살 때부터 써오기 시작해서 61세인 1975년에 발표를 했으니 정말 오랜 세월 동안 공이 들어간 작품이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차례가 지나고 첫 장을 넘기면 위에 있는 문장이 나온다. 정상은 아닌, 모모가 정상인 사람들은 비열하다고 했으니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책이다. 야무지고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이 책을 읽고 있자니 등장인물들이 굉장히 낯선 느낌이다.

모모, 로자 아줌마, 하밀 할아버지, 쉬페르

모모와 로자 아줌마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7층에 살고 있는데 그 집에는 엄마들이 키울 수 없어서 맡겨진 아이들이 많이 있다. 모모도 그런 아이 중 하나인데 6~7살 때 로자 아줌마에게 자기를 키워주는 대가로 매달 돈이 지불되는 것을 알고 큰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에게 많이 의지하면서 살지만 아줌마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7층을 오르내리는 것도 큰일이 되었다. 그리고 하밀 할아버지는 소설의 초반부부터 모모의 멘토 비슷한 역할로 나오는데 둘의 대화 장면은 정신없는 와중에 산소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소설 초반에 최고라는 뜻의 쉬페르라는 강아지가 나오는데 모모는 그 개를 너무 사랑해서 500프랑을 주고 길에서 만난 부인에게 판다. 하지만 그 돈은 그 부인이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를 행복하게 해 줄 진짜 부자가 맞는지 테스트해보기 위함이었기에 하수구에 버려버린다. 이 에피소드에서 모모의 순수한 사랑의 행동들이 그렇지 않은 현실과 대조되며 마음이 아프다.

거꾸로 된 세상, 이건 정말 나의 빌어먹을 인생 중에서 내가 본 가장 멋진 일

인정이란 쉼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은 것

로자 아줌마의 건강이 안 좋아질수록 모모는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걱정과 아줌마에 대한 연민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다가 하밀 할아버지가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가하다고 말하자 로자 아줌마의 눈빛을 떠올리면서 그것은 인생 전체와 같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모모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느껴지는 부분이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에 대한 걱정과 연민으로 불안한 날들을 보내다가 나딘 아줌마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일하는 영화 녹음실에서 화면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을 처음으로 보면서 감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소설의 묘사가 신선했다. 이때도 로자 아줌마를 떠올리며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고 모모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엄마를 떠올리기도 한다.


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로자 아줌마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자주 정신을 잃기도 하는데 모모의 진짜 나이가 밝혀지는 장면(아버지의 충격적인 등장)에서는 다행히도 가장 정신이 또렷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하밀 할아버지도 점점 시력과 기억력을 잃어서 소설 초반에 자신 있게 말하던 옛 연인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된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와의 생활과 자신만의 생 사이에서 방황하며 이웃들의 도움도 얻으면서 버티다가 결국엔 둘만 남게 된다. 모모가 혼자서 로자 아줌마의 마지막 모습을 감당하기로 한건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이었던 것 같다.

사랑해야 한다

「자기 앞의 생」을 처음 읽었을 때 마지막 문장, '사랑해야 한다'가 가슴 깊이 박혀서 너무 벅찼던 기억이 난다. 잘은 모르지만 내가 문학에서 기대하는 모든 걸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에밀 아자르가 누구길래 이렇게 글을 잘 쓰나 하다가 로맹 가리란 소설가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 당시엔 누군가에게 선물할 일이 생기면 이 소설을 많이 건넸는데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 선물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다.

이 소설은 슬프기도 하지만 모모의 시선에서 보여지는 등장인물들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표현들이 재미있었는데 중간에 은다 아메데 씨와 두 경호원에 대한 생각들이 특히 그랬다. 그리고 중간중간 순수한 모모지만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대해 냉소적일 수밖에 없는 생각들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어른들이 하는 말들과 반응들에서 원래 삶은 그런 것, 낫지 않는 것, 어쨌든 살아야 하는 것 등등이라고 말하는 밑바닥엔 뿌리 깊은 불행이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어른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극복하기 힘든 불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죽을 때까지 그런 느낌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모모는 아마 전자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지막 페이지에서 온 마음을 다해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길 바란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길 바란다.